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예 아리아인 (문단 편집) === 한국인 === 일본과 달리 한국은 아파르트헤이트 때문에 남아공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꺼렸다. 남아공은 1961년 두 나라가 외교관계를 협상할 때 한국 국민들에게 명예 백인의 지위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국은 1978년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항의로 남아프리카와의 관계를 단절했고, 1992년까지 양국간의 완전한 외교 관계는 다시 수립되지 않았다. 한국인은 [[백인]] 대우를 국가적으로 받은 게 아니라 그냥 일개 몇몇만 운좋게 일본인이나 홍콩인인 줄 착각해서 받았다고 한다.[* 이는 싱가포르도 마찬가지이며 싱가포르는 선진국이었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명예백인 취급받지 못했으며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반발로 단교하였다.] 공식적으로는 당시 한국도 다른 나라들처럼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표시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92년까지 단교국가, 여행 제한 국가였다.''' 이게 꽤나 중요한게, 남아프리카 공화국 성립 전인 남아프리카 연방은 엄연히 [[6.25 전쟁]] 때 한국에 전투 병력을 파병한 16개 군사 지원국들 중 한 곳이다. 대한민국은 이에 보답하는 뜻에서 휴전 후 세계 각국과 외교 관계를 맺을 때 가장 먼저 이 군사 지원국들과 수교를 맺었고 그게 현재까지 단교없이 지속되어 왔다. 그런데 남아공 만큼은 예외로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날 때까지 유일한 단교국으로 남은 것이다. 이 당시에 수교협상이 있었고, 남아공측에서 한국인들을 명예백인으로 대우해주겠다고 나섰지만, 외교관들이 이 명예백인 시설 개방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해서 수교는 없던 일이 되었다. 또한 한국측에서 체제경쟁과 UN가입등의 사안에 대해서 타 아프리카 국가와의 관계를 맺는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일부로 수교를 안 한 것도 있었다. 그래도 경제, 문화 교류는 있었다. 또한 남아공은 아프리카에서 경제규모가 가장 컸던 나라였기 때문에 아파르트헤이트 당시에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아프리카]]의 무역 상대국의 하나였다. 대한민국 기업이 남아공에 지사도 내고 교민도 건너가서 살기까지 했다. 다만 공산 국가는 아니었지만 1956년부터 사전 허가가 없는 경우 [[여행금지|여행제한국가]]로 지정되었고[* 당시에는 권고사항이긴 했다. 이 당시에는 여행금지국가가 아니더라도 해외여행 한번 가기 쉽지 않던 시절이라 남아공까지 가서 사는 사람들은 주재원이나 사업차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는 했다.] 한국인은 방문하면 인종 차별을 받을 수 있다는 불편함에 따른 우려로 방문을 꺼렸다. 당시에는 방문하려고 해도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고 제3국에서 비자를 발급받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래도 한국인은 대만인과 같이 반공정신이 투철한 터라 어느 정도 좋은 대접을 받았다고 현지서 아파르트헤이트를 겪은 교민 1세대들이 증언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